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이지 유신 (문단 편집) === 메이지 유신과 [[그레이트 게임]] === 일본의 메이지 유신 시기는 19세기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패권 경쟁인 [[그레이트 게임]], 프랑스-독일간의 전쟁인 [[보불전쟁]],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와 시기가 겹친다. 메이지 유신보다 빨랐던 이집트나 베트남은 아직 여력이 있었던 열강의 개입으로 무너지고, 조선, 청은 위의 사건들이 모두 일단락되고 다시금 다른 식민지를 찾으러 나가던 열강들과 일제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면서 사실상 일본의 근대화는 행운이 따라준 사건임을 증명하게 된다. 그레이트 게임시기 영국이 동아시아의 동맹세력을 찾는 과정에서, 영국은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고 이후 성립된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다만 여기서 일본이 근대화라는 과업을 이룬 것이 순전히 영국의 도움 덕분이었다는 식으로 확대해석해서는 안된다.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영국의 이익에 위협이 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유신보다 10년 이상 뒤의 일이고, 그 이전의 영국은 중국에서 재화를 뜯어내는데 골몰하느라 일본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정론에 가까운 관점은 일본 스스로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에 성공한 것을 본 이후에 영국이 일본을 대러시아 전선의 파트너로 삼았다는 것이고, 영미권 역사학자들 거의 모두가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교]]의 일본 근현대사 교수인 앤드류 고든(Andrew Gordon)] 먼저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영국이 일본에 개입한 것은 오랜 앙숙인 프랑스를 엿먹이기 위한 의도와 위협적이었던 러시아가 동아시아 방면으로 남하하여 부동항을 차지하려는 시도를 억제하려는 의도가 적잖이 있었다. 유신 이전에 막부는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받았는데, 프랑스는 막부가 서양식 무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차관을 제공하고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는 등 막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이 때 영국은 프랑스와 반대로 토막파를 지원하여[* 영국은 만약을 대비해서 막부에도 줄을 대기는 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기여하였다. 이후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고 일본이 빠르게 서구식 제도와 기술을 습득하자 영국은 일본을 높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1899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발발했을 때 8개국 연합군 중에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하자, 영국은 일본을 유럽의 중견국가들과 대등한 위치로 놓고 평가하였고, 1894년에는 서양 국가들 중에 가장 먼저 과거 개항 시기에 일본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고쳐주기까지 했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소위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는 중이었다. 러시아는 예전부터 [[부동항]]을 찾아 꾸준히 남하해오고 있었고, 이러한 러시아의 시도는 1850년 [[동유럽]]에서 벌어진 [[크림 전쟁]]의 패배로 인해 좌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에 걸쳐 끊임없이 기회를 엿보며 영국의 이익과 충돌하고 있었다. 영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 지구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대영제국]]에는 해가 저물지 않는다"라고 불리는 초강대국이었지만, 반면에 너무 넓은 지역에서 너무 많은 식민지를 경영했기 때문에 멀리 동아시아까지 충분한 전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 서구열강의 식민지가 없는 이유다. 19세기 식민지 영국군의 일반 [[보병]]이나 [[기병]]은 거의 현지인으로 충당되었는데, 북부와 중부 [[아프리카]]에서 사용할 군대는 [[이집트]]에서 모집하고, [[인도]]에서는 [[시크교|시크교도]]와 [[구르카|구르카족]] 용병을 사용하는 식이었다.[* 원래 영국은 [[벵골]] 지역에서 모집한 [[힌두교|힌두교도]]나 [[이슬람교|이슬람교도]]로 인도 용병을 구성하였지만, 1857년에 발생한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시크교도와 구르카족으로 바꾸었다.] 이 때문에 식민지 영국군에서 영국 본토 출신은 [[장교]]나 [[포병]]과 같이 중화기를 다루는 부대의 병사 등 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식민지 행정을 담당하는 하급 관료도 아프리카에는 인도인을 데려다가 쓰고, [[미얀마]]에는 [[로힝야족|방글라데시인을 데려다가 쓰는]] 등 식민지 출신을 주로 발탁했기 때문에, 식민지 경영을 위해 필요한 영국 본토인의 수는 방대한 식민지 규모에 비해서 한줌에 불과했다. 영국이 식민지를 경영했던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고, 그렇게 식민지에서 들어온 돈으로 식민지 출신을 고용해서 제국을 운영했다. 한편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청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이탈시키면서 조선을 자신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조선은 일본의 입김이 거세지자 [[이이제이]]의 전략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여 대항하였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의 남하 시도는 노골적이었는데, 러시아는 1898년 청나라로부터 [[뤼순]]과 [[다롄]] 등을 [[조차지|조차]]받아 [[만주]]와 [[연해주]]로 진출하였고, 조선에서도 일본의 지위에 적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택한 것이 일본이다. 영국은 1902년에 일본과 동맹을 맺었고, 1904년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을 지원했으며, 이러한 영국의 지원에 힘입어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또한 일본은 당시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 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고, 더 이상 경쟁자가 사라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영국과 일본의 동맹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이유는 일본이 조선에 이어 중국까지 식민지화 하려는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마자 영국측 진영의 일원으로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참전해서 [[칭다오]]를 비롯한 [[산둥 반도]]의 독일 조차지와 철도 등을 접수하였으며, 1915년 1월에는 중국의 [[위안스카이]] 정권에 악명높은 [[21개조 요구]]를 들이댔던 것이다. 그래도 일본은 1920년대 중반까지 영국과 미국이 일본의 급발진을 제지할때마다 어느정도 타협하며 물러났었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서구 열강 국가들이 중국의 자주권을 인정하며 중국에서 서서히 물러났던 것과는 반대로, 일본은 끊임없이 이 공백기를 이용해 만주와 중국 북부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결국 1930년대에 들어와서 영국과 일본의 관계는 파탄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